끔찍한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범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 미스터리한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다카베의 심리 스릴러. 봉준호 감독이 인생 영화로 꼽았다는 그 작품, '큐어'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내면을 파고드는 섬뜩한 공포를 선사합니다. 단순한 공포 영화를 넘어, 인간의 무의식과 파멸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볼까요?
영화는 도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연쇄 살인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피해자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고, 범인들은 쉽게 붙잡히지만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렸다고 주장할 뿐이죠. 정신과 의사 사쿠마는 그들에게서 특별한 정신적 문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영화는 형사 다카베의 내면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사건의 실마리는 해변을 헤매던 기억 상실증 환자 마미야의 등장과 함께 풀리기 시작합니다. 마미야는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이 돌변하여 살인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다카베 형사는 사건의 배후에 최면이 있을 가능성을 직감하지만, 사쿠마는 이를 믿지 않죠. 하지만 마미야는 자신을 조사하는 경찰관과 의사에게도 최면을 걸어 그들을 살인자로 만듭니다. 마미야를 심문하던 다카베는 점차 무력감을 느낍니다. 정신 질환을 앓는 아내 때문에 지쳐있던 그는 마미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맙니다. 마미야의 집에서 발견된 최면 자료들은 그가 단순한 기억 상실증 환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다카베는 마미야의 최면에 저항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어두운 욕망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마미야는 탈출하고, 다카베는 최면 암시를 따라 그를 찾아가 살해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마미야가 남긴 테이프를 들은 다카베는 깊은 최면에 빠지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내를 살해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카베는 식당에서 웨이트리스에게 최면을 걸며 미소를 짓습니다. 마미야의 끔찍한 영향력이 다카베에게 전이된 것입니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는 일본의 거장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의 대표작입니다. 그는 '큐어'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며, 공포 스릴러 장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잔혹한 장면보다는, 일상 속에서 스며드는 낯선 공포와 인간의 심리적 불안정을 다루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입니다.
'큐어' 또한 감독의 이러한 스타일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특별한 배경 음악이나 갑자기 튀어나오는 연출(점프 스퀘어) 없이, 롱테이크 기법과 일상적인 소음을 활용해 관객의 심리를 서서히 옥죄어 옵니다. 믹서기 소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들이 공포의 매개가 되면서, 관객은 어느 순간 이 평범한 세상이 가장 무섭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만들 때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을 만큼, 이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민 배우'로 불리는 야쿠쇼 코지(役所広司)는 지쳐 있고, 불안하며, 동시에 폭력성을 내재한 다카베 형사를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큐어'가 제작될 당시, 그는 '쉘 위 댄스'(1996)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처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역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큐어'에 캐스팅했고, 이 작품은 두 사람의 끈끈한 협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후 야쿠쇼 코지는 구로사와 감독의 다른 작품들인 '회로', '절규', '도쿄 소나타' 등에서도 페르소나로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렸습니다.
영화의 모든 공포와 미스터리를 상징하는 인물, 마미야 역은 배우 하기와라 마사토(萩原聖人)가 맡았습니다. 그는 기억을 잃은 듯한 순수한 얼굴 뒤에 숨겨진 섬뜩한 최면술사를 소름 끼치도록 연기했습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알 수 없는 눈빛은 관객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주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다카베 형사의 심리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미야라는 인물이 가진 '악의 전염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그의 연기는 이 영화를 단순한 범죄물 이상의 심리 스릴러로 만든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입니다.
'큐어'는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왜 최면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영화는 명확한 해답 대신, 우리 안의 숨겨진 욕망과 폭력성이 최면이라는 도구를 통해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악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감정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과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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