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기증(Vertigo) 줄거리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직 경찰 ‘존 퍼거슨’(제임스 스튜어트 분)입니다. 그는 범인을 추격하던 중 높은 곳에서 떨어질 뻔한 사고를 겪은 뒤 고소공포증과 심한 현기증을 앓게 되며, 경찰 일을 그만두고 요양 중입니다. 그러던 중, 대학 시절 친구였던 개빈 엘스터가 그를 찾아옵니다. 개빈은 자신의 아내 ‘매들린’(킴 노박 분)이 최근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며 그녀를 몰래 감시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퍼거슨은 마지못해 이를 수락하고 매들린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그는 곧 매들린이 자살한 조상인 ‘칼롯타 발데스’의 영혼에 사로잡혀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무덤과 초상화, 옛 호텔 등을 다니며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녀를 목격합니다. 퍼거슨은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고, 결국 둘은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어느 날, 매들린은 산장 꼭대기 종탑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고 퍼거슨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그녀를 따라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결과, 매들린은 떨어져 죽고 퍼거슨은 충격으로 정신이 무너져버립니다. 정신병원에서 회복한 퍼거슨은 매들린을 잊지 못한 채 거리를 방황하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인
‘주디’(역시 킴 노박 분)를 만나게 됩니다. 퍼거슨은 그녀에게 집착하게 되고 점차 매들린의 모습으로 그녀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헤어스타일, 옷, 심지어 화장까지 매들린처럼 하도록 강요하는 퍼거슨의 집요함에 주디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하기에 따르려 합니다. 그러나 퍼거슨은 점차 의심을 품기 시작하고 주디가 실제로 매들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알고 보니 진짜 매들린은 이미 살해되었고, 주디는 개빈 엘스터의 애인이자 공범으로 매들린을 위장해 퍼거슨에게 살해 위장을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엘스터가 진짜 아내를 죽이고 이를 위장하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진실을 알게 된 퍼거슨은 주디를 데리고 사건이 벌어졌던 종탑으로 향합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공포극복하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진상을 밝혀냅니다. 하지만 주디는 갑작스레 나타난 수녀의 그림자에 놀라 종탑에서 떨어져 다시 한 번 죽음을 맞이합니다. 퍼거슨은 그 자리에 서서 마치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절망과 충격에 잠기게 됩니다.
2. 시대적 배경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 1958)은 단순한 심리 스릴러를 넘어,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불안과 정체성 위기를 은유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와 그 속에 깔린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면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불안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는 미국 사회가 냉전(Cold War)의 한복판에 놓여 있던 시기입니다. 소련과의 이념 대립 속에서 미국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집단적인 불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영화 속 퍼거슨이 느끼는 혼란과 정체성 상실, 그리고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 붕괴와 맞닿아 있습니다. 퍼거슨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고 현실의 여성을 이상화된 이미지로 재구성하려 합니다. 이는 냉전기 미국 사회가 "이상적인 미국인" 또는 "완벽한 삶"이라는 환상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무너져갔던 모습과 유사합니다. 영화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이 도시는 미국 서부 개척 정신의 상징이자, 당시에도 급격한 현대화와 변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영화는 이 도시의 아름다움과 불안정함을 동시에 포착해냅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안개 자욱한 거리, 미션 돌로레스 묘지, 금문교 등은 죽음과 시간, 망각이라는 테마와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1950년대 미국은 전통적인 성 역할이 강조되던 시기였습니다. 여성은 가정적이고 정숙한 아내이자 어머니여야 했고, 남성은 보호자이자 결정권자였습니다. 그러나 현기증의 여주인공은 이 규범에서 벗어난 이중적인 존재였습니다. 매들린(혹은 주디)은 한편으로는 신비롭고 고귀한 여성으로 이상화되지만, 동시에 남성을 속이고 조종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여성상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자율성과 변화하는 역할에 대해 느꼈던 양가감정을 반영합니다. 히치콕은 영화 전반에 걸쳐 심리적 묘사와 시각적 기술을 정교하게 활용했습니다. 특히 회전하는 카메라워크(‘돌리 줌’ 또는 ‘베르티고 효과’)는 퍼거슨의 고소공포증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인간 심리의 불안정성을 형상화합니다. 이 또한 1950년대 미국이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우려하던 시대 분위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3. 총평
1958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걸작, ‘현기증’(Vertigo)은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인간 심리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미스터리 로맨스입니다.이 영화는 한 남자의 강박, 사랑, 그리고 환상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치밀하게 그려냅니다. 영화는 개봉 당시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엇갈린 반응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진가가 재조명되었고, 지금은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현기증'은 시각적 언어와 카메라 기법, 음악, 미장센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대표적인 장면인 ‘돌리 줌’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이는 주인공 퍼거슨의 내면을 시각화하고 관객이 그의 심리 상태에 직접 몰입하도록 유도합니다. 히치콕은 이 영화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쉽게 집착과 환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조명합니다. 주인공은 결국 진정한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 점에서 '현기증'은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심리 스릴러이자 인간 내면의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영화는 현대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자아 정체성, 트라우마, 기억의 왜곡,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들입니다. 히치콕은 단순히 범죄극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복잡한 주제들을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적 공간에 겹겹이 쌓아 올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심리적 미로를 완성했습니다. 주연을 맡은 제임스 스튜어트는 퍼거슨이라는 인물의 불안, 죄책감, 집착을 입체적으로 그려냈습니다. 특히, 중후반부에서 여주인공 ‘주디’를 ‘매들린’으로 바꾸기 위해 몰아붙이는 장면은 스튜어트 특유의 선한 이미지와 집착적인 광기가 교차하며 강렬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킴 노박 역시 이중적인 여성상(신비롭고 우아한 매들린과 현실적이고 연약한 주디)을 설득력 있게 소화해냈습니다.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도, 단순한 멜로드라마도 아닙니다. 이는 사랑, 환상, 죄책감,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입니다. 히치콕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을 미로 속으로 이끌고 끝내 탈출구 없이 그곳에 남겨둡니다. 그것이 바로 '현기증'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하고 위협적인 이유입니다.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층(The Thirteenth Floor, 1999), 판타지, 미스터리, SF, 스릴러 (2) | 2025.04.24 |
---|---|
슬픔은 그대 가슴에(Imitation of Life, 1959), 드라마, 멜로/로맨스 (0) | 2025.04.24 |
아일랜드(The Island, 2005), 액션, SF, 모험 (0) | 2025.04.23 |
가타카(Gattaca), SF, 드라마, 스릴러, 유전자 (4) | 2025.04.23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9),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0) | 2025.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