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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이탈리아 여행(Viaggio in Italia, 1954), 드라마

by 모락모~락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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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여행' 줄거리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한 캐서린 조이스와 조지 샌더스가 연기한 알렉스 조이스는 영국의 중년 부부입니다. 그들은 최근 사망한 삼촌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처로 여행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관광도 하고, 바닷가 근처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치 오랜만의 여유로운 커플 여행처럼 보이지만, 이내 그들의 결혼 생활에 뿌리 깊은 소외와 감정의 거리감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차를 타고 나폴리로 가는 길에서도 대화는 단절되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노출됩니다. 알렉스는 캐서린을 비꼬고, 캐서린은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시인을 떠올리며 과거에 빠져듭니다. 나폴리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각자 따로 시간을 보냅니다. 캐서린은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하며 폼페이 유적이나 죽은 연인들의 화석 같은 장면을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삶의 공허함을 느낍니다. 알렉스는 지루함에 여자를 만나려 하거나 클럽을 방문하며 자신을 분산시키려 합니다.

 

점점 서로의 감정이 폭발하면서, 이들은 이혼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풍경과 죽음, 역사, 예술 등은 두 사람에게 어떤 근원적인 감정, 즉 인간의 외로움과 연대감에 대해 묘한 울림을 줍니다. 캐서린은 화산재에 의해 그대로 보존된 사랑하는 사람들의 유해를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인간의 사랑이 덧없지만, 동시에 너무나 깊고 진실했던 것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나폴리에서 열리는 종교적 행렬 속에 휩쓸립니다. 서로 떨어졌다가, 다시 만난 군중 속에서 서로를 부여잡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끌어안습니다. 영화는 둘의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 어린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2. 시대적 배경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유럽인들은 정신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물리적 폐허는 복구되었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와 인간관계의 해체가 사회 전반에 퍼졌습니다. 영화 속 캐서린과 알렉스의 감정적 거리와 무미건조한 대화는 바로 이 시대의 공허한 인간상을 반영합니다.

  • 조이스 부부는 전후 부유해진 영국 중산층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 그들은 겉보기에 안정적이고 풍요롭지만, 감정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 이러한 인물 설정은 1950년대 유럽의 소비문화 확산과 그것이 가져온 영혼 없는 부부관계를 은유합니다.

영화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등 고대 유적이 가득한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 로마의 유산, 박물관의 유골, 미켈란젤로 등의 예술 작품은 죽음과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이런 배경은 현재의 인간 관계가 얼마나 덧없고, 동시에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종교적 행렬과 같은 장면은 이탈리아의 전통적 신앙과 공동체 문화를 보여줍니다. 캐서린과 알렉스는 이 세계에 처음엔 이질감을 느끼지만, 결국 이 문화 속에서 감정의 해방과 화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1950년대 초 이탈리아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예: '자전거 도둑')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나, 로셀리니는 이 작품에서 보다 내면적인 심리 탐구로 전환합니다. 현실의 사회 문제 대신, 서구 지식인들의 내면 위기와 관계의 단절을 깊이 있게 조명했습니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는 냉전 초기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본격화되던 시기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 정체성 혼란, 가치관의 재정립 같은 문제는 냉전 시대의 불안정한 정신적 배경과도 연결됩니다.

 

3. 총평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외적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조명한다는 점입니다. 말수 적은 대사와 긴 침묵 속에서도, 잉그리드 버그만의 표정과 시선, 움직임만으로도 감정의 층위를 드러냅니다. 부부의 거리가 단순한 권태가 아니라,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폼페이 유적, 고고학 박물관, 미켈란젤로의 조각 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과 사유를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죽음과 시간의 이미지가 부부의 침묵 속에 스며들며, 현실의 위기를 더욱 실감나게 만듭니다. 로셀리니는 대립과 갈등을 폭력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절제된 방식으로 서서히 쌓아갑니다. 마지막 종교 행렬 속에서의 감정 해방은 이 긴 여정의 감정적 결실로서, 관객에게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흥행은 미미했으나, 이 작품은 작가주의 영화, 누벨바그, 현대 예술영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은 '스토리 없는 영화도 감정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며, 현대 영화 언어를 바꾸는 데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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